첫 입원
2003년이었다.
1년 넘게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뭔가에 홀린 듯 한창을 열심히 살았다.
당시 공익근무를 하며 구청에서 일했는데, 구청일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 운동을 다녔다.
새벽에는 영어회화학원도 다녔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들과 저녁에 술자리를 늦게까지 갖기도 했다.
아무리 젊었어도, 체력이 떨어지게되고, 무리를 지속하니 면역력이 떨어졌던지,
어느날 밤 온몸에 오한이 온듯 몸이 떨려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늦은 밤에 덜덜 떨면서 안방문을 두드렸다.
“엄마 아빠, 나 너무 추워요”
어머니가 급하게 체온을 재보니 40도가 넘었다. 깜짝 놀란 부모님은 나를 차에 태우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는 해열을 위한 응급조치를 하였으나, 열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입원절차에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을 한 기억이다. 나의 2주에 걸친 병원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음날에도 38도 이상의 고온이 지속되었다. 병원의 해열제로도 열이 내려지지 않자, 의사들은 이런 저런 검사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에 피를 두 실린더씩 뽑았던 것 같다. 몸 구석구석을 집어보면서, 몽우리가 있는 쪽에 조직을 떼어서 검사했다.
몽우리가 잡히는 곳이 있으면, 조직검사 전에 ‘xx 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검사를 하노라고 부모님께 설명하였다.
의사들은 겁을 주는데 일각연이 있다. 물론, 그들의 입장도 이해는 한다만.
매일같이 고열이 나고, 피를 뽑아대고, 병원밥이 맛도 없으니, 입맛이 떨어졌다. 적게만 먹으니 살이 쭉쭉 빠졌다.
4~5일이 지나자 안그래도 마른 몸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몸에 힘도 없고, 고열과 근육빠짐으로 인한 통증도 있었다.
어느날 고통을 호소하니, 병원에서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처음으로 진통제라는 것을 맞아보았다.
약이 바늘을 통해서 몸으로 들어가니, 손끝과 발끝부터 따뜻해지더니, 고통은 사라지고 기분은 좋아졌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따뜻한 느낌이 기억이 난다.
“와… 이거 뭔데 몸이 따뜻해져요?”
라고 간호사에게 물으니, 진통제여서 정말 아플때만 가끔 놓아줄 수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었을까?
아들이 앙상해지고, 원인모를 고열에 일주일이 넘게 시달리자, 어머니는 밤마다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시면서 울곤 하셨다. 이상하게 나는 내가 큰 병일 것 같다는 생각자체가 없었는데, 어머니는 의사들의 계속되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겁이 나셨는지. 밤에 그렇게 우셨다.
일주일이 넘어도 입원을 계속하고 있자. 병문안들을 오기 시작했다.
친구들이오고 친척들이 왔다. 나를 측은하게 보는 사람들과 쓸데없이 누워있지 말고 빨랑 나가자고 장난스레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학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내가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이것저것 하면서 무리해서 살다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졸지에 순정남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결국, 헤어졌던 여자친구도 병문안을 오고 말았다.
측은하고 미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아프지 말지…”, “어서 나아” 라는 말들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아, 나 정말 괜찮아.” 이런 류의 대답을 했던 것 같고…
키쿠치병
그렇게 거의 10일에 걸친 검사가 진행되던 어느날 아침, 젊은 의사선생님이 병실에 오셔서 부모님께 무슨 병인지 알았다면서 설명해주셨다. ‘키쿠치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즉 키쿠치병이 고열 등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의사는 바이러스라는 것이 특별히 치료법은 없고, 몸의 면역력이 높아지면 바이러스가 활동할 영역이 줄어들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설명하였다.
즉, 절대 안정을 취하면서 피로하지 않게 해주면 된다고 했다. 잘 먹고, 잘 자라고… 굉장히 허무한 이야기였는데, 더 허무했던 것은 그렇게 병명을 알아내고 그 날부터 피검사 등 이런 저런 힘든 검사들이 중단되자 컨디션이 급격히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드디어 치킨 같은 맛좋은 음식들을 사오시기 시작했고, 나도 병실에서 소설책을 잔뜩 읽으면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렇게 한시름 놓으신 부모님을 달래며, 두 분 모두 오랜만에 편히 주무시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 10일간 주중에는 어머니가, 주말에는 아버지가 병실에서 함께 주무셨으니 피로가 많이 쌓이셨던 터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혼자 병실에서 잠든 그 날 밤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암전
새벽에 잠에서 깬 나는 화장실을 가기위해서 걸어나왔다. 소변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검은 파편 같은 것들이 ‘파바박’ 하고 박히는 듯 했다. 그러면서 눈 앞이 검게 변했다. 나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밝은 방에서 눈을 감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무섭고 당황한 나는 손으로 주변을 집으며 서둘러서 병원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저기요,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며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간호사 한 분이 조금 멀리서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눈을 떴는데, 눈이 보이지 않아요.”
라고 대답했다.
순간 부산스러운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숙직을 하는 몇 명의 간호사가 쑥덕거렸고, 한분이 나에게 달려와서 목과 어깨를 주무르면서 증상에 대해 물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간호사가 급하게 무언가를 들고와서 손에 채워줬다. 뭔가를 검사하는 듯 했다. 그 때 나는, ‘아 이렇게 눈이 멀게 되면 어쩌지.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게되는 거지?’ 하면서 매우 두렵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했다.
그런데 아주 다행히도, 잠시후 검은 파편들이 박히는 듯한 그 장면을 마치 되돌리듯, 조금씩 빛의 파편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어? 뭔가 희미하게 다시 보이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간호사분은 더욱 열심히 목과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그러면서
“누워서 좀 쉬시겠어요?” 했다. 나는 “아니요. 지금 돌아오는 것 같으니까. 좀 더 이렇게 있어볼께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잠시후 눈앞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혹시 다시 또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둠속에서 한동안 눈을 멀뚱히 뜨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날 밤은 나에게 아주 긴 시간이었다. 나중에 간호사에게 들었을 때는 몇분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사실 이 경험은 ‘어떤 병일지 모르면서 아프던 그 순간보다도 더 두려운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눈을 살펴보시고, 빈혈로 인해 발생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정밀 검사를 해보자고 하셔서 시신경과 관련된 동맥을 살펴보는 MRI를 찍기로 했다. 피를 형광으로 해주는 무언가를 투여하고, 오후에 검사를 진행했다. MRI 영상을 부모님과 함께 보면서 설명을 들었는데, 3D로 나오는 내 뇌와 그 주변을 둘러싸며 뻣어있는 혈관들의 모습이 적나라해서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왔다. 검사 결과, 동맥이 조금 얇아져 있기는 하나, 위험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역시나 원인은 빈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였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병명을 알아낸다고 아침마다 피를 두세통씩 뽑아댔는데, 빈혈이 안오고 베기겠냐’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 검사를 마지막으로 입원 중에 더이상의 검사는 없었다. 그 이후 3일 정도 입원 병실에서 안정을 취했고, 컨디션, 몸무게 등이 급격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때 존 그리샴의 법정스릴러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퇴원
그렇게 잘 쉬고, 좋은 것을 먹고 하니 키쿠치 바이러스는 떠나갔다. 얼마 후 퇴원해도 좋다는 판정을 받았고, 2주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입원 생활의 기억이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 뿐 아니라, 많은 ‘첫’ 경험들을 했다. 나를 병문안 온 친구들과 친척들을 맞이하던 기분과 그리고 그들의 측은한 눈빛이 기억에 남아있다. 다소 민망하면서고 고마운 마음이었다. 당시에는 고작 20대 초반이었던 나였기에 큰 병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나 걱정 자체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 그와 비슷한 상황이 또 닥친다면 정말 아찔하고 두려울 것만 같다. 각종 검사를 하기위해 아침마다 피를 뽑던 기억이 나는데, 하루는 피를 뽑다가 내 팔에 꽂힌 실린더를 바라봤었다. 문득 피가 정말 ‘콸콸콸’ 나오는 장면을 보게되었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덕분에 나는 아직도 건강검진 등으로 피검사를 할 때, 절대로 내 팔과 피가 나오는 모습을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암전’의 기억은 정말 선명하고 두려운 것으로 남아있다. 당연하게 보아왔던 것들과 내 눈, 그 뿐 아닌 다른 신체 하나하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이후, 나는 몸에서 피곤하다는 신호가 발생하면, 왠만한 약속은 모두 취소하고 쉬는 버릇이 생겼다. 무리하지 않고, 내 체력을 맹신하지 않게 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는 것을 보면,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